예배의 깊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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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세대 예배자 (10)
"예배의 깊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아니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부분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만남은 관계가 매우 중요한데, 단순히 많은 시간을 만났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의 기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은 어떤 관계로 발전되어 있는가이다. 셀 수 없는 수많은 예배를 드렸어도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갖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변화와 내용과 내용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지난 시간에도 나누었듯이 요한복음 4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 본문을 묵상할 때에, 본문의 대화에서 눈에 띄는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대화를 시작한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부르다가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중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니 나아가 ‘예언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태도는 대단히 클 뿐만 아니라 혐오하며 적대적이다. 또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하는 마음도 대단히 높고 크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기도하며, 사용하던 붓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며 물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사건과도 같은 충격적인 만남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이러한 배경에서 요한복음 4장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을 향한 사마리아 여인의 달라지는 호칭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러한 불편한 삶의 자리에 있던 한 여인의 삶의 변화와 믿음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믿음의 성장을 중국에서 있었던 사역을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었다. 2015년 8월에 3주간 중국의 현지교회(삼자교회와 가정교회)에서 예배자를 훈련시키고자 중국 곳곳의 현지교회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상해 근교의 도시에 보냈고, 그들과 만남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 뉴질랜드 및 필리핀에서 예배사역자들과 강사들이 그곳에 모여서, 그들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40여 명의 청소년 및 청년들과 함께 예배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하고, 예배를 돕기 위해 악기(어쿠스틱 기타)를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3주간의 특별한 의미가 느껴지는 만남을 갖게 되었다. 뉴질랜드를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약 17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었는데, 타국의 다른 문화와 내가 익숙한 문화 등의 충돌로 인해서 때로는 불편함도 느끼고, 때로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특별한 만남이기에 설레임과 기대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켠에는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 현지 청소년 및 청년들을 처음 만나는 설레임과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로 인한 걱정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중국이라는 나라와 중국 사람에 대해 보고 들으며 생겨난 선입관이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이미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그러한 선입관에서 생겨난 두려움은 점점 약해지고, 나아가 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에 발견되는 그들의 순수한 마음과 모습이 내게 도전을 주었고,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좀처럼 바뀔 것 같지 않은 저들에 대한 선입견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공산주의의 체제였기에 지켜질 수 있었던 신앙의 순수성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예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주제로 강의가 이루어지고, 매일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저들에게 마치 스폰지처럼 흡수되는 모습은 한국의 70년대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나타났던 부흥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그렇게 그들과 3주간 합숙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청소년 및 청년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은 누구신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해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과 말씀을 나누며 예배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고도 깊이 나눌 때에, 하나님은 저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통하여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저들의 모습에서 가슴 벅차게 밀려오는 감격과 은혜를 경험한 특별한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주제를 나누었을 때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그들이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을 고백하기 시작하였고, 섬기던 사역자들이 ‘너희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란다’고 알려주며 선포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말씀을 마음에 받아 믿고 영접하던 한 학생이 질문했는데, 그 질문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면 우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겠네요’라는 감탄과 감격이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질문이 질문처럼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그 학생의 고백과 선포처럼 여겨졌는데, 그 이유는 이 학생의 감탄과 감격이 담겨 있는 이 질문이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내가 주를 만났습니다’라고, 성으로 뛰어가며 고백했던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통하여 가장 먼저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라는 새로운 관계를 선포하였다. 사실 그 관계를 먼저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셨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도, 탕자의 정체성은 결국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때때로 우리는 생각하기를 탕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벌을 받은 종이나 노예처럼 나아가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로서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 현지의 한 학생이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는 매우 귀한 존재이고 대단한 존재이다. 우리가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에 귀한 존재가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기억하며, 마음 깊이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정체성과 꿈과 길과 가능성을 열어주고, 이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은 느낌이 아니다. 느낌 이전에 진리이고 약속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예배자들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이곳에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믿는 자들이고,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만이 모든 예배자들의 기대감이기도 하다. 이것이 예배의 시작이고, 우리의 신앙이다. 예수님은 미래가 불투명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의 소망을 찾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느 장소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이라는, 벗어나기 힘든, 인생의 운명처럼 여겨지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이 여인은, 어쩌면 자신의 소망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었기에, 어쩌면 여인에게는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 수 있을 것이고, 여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 고민과 질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고민과 질문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에, 예수님은 그 고민과 질문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과 드리는 사람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마치게 된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깊은 만남을 통하여 깊이 있는 예배를 경험하게 되고, 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하여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든 예배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원처치 저자 김태원 목사

저자 김태원 목사는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및 대전 침례신학대원(M. Div) 졸업했다. 청년 사역자 모임에서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현재 뉴질랜드 에덴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Who's 원처치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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