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와 성진 교회 종탑에서 울려퍼진 피눈물의 종소리>
성경 말씀 |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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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와 성진 교회 종탑에서 울려퍼진 피눈물의 종소리>
유라시아 원이스트 대표 정진호 글.
3.1 만세운동, 북한 동해안 도시 (원산 함흥, 성진…)에서는 그날 무슨일이 있었을까?
극비리에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3.1 독립선언서가 멀리 북한의 여러 도시에 전달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첩보작전이 필요했다. 일경의 눈을 피해 인쇄뭉치를 전달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장사꾼이나 가정주부로 위장한 사람들의 속옷 안에 감춘 사본을 경의선과 경원선 기차를 통해 전달한 후에 현지에서 등사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평양, 남포, 안주, 선천, 의주의 경의선 도시와 경원선의 원산까지는 3.1절 당일을 맞추어 독립선언서가 준비되어 3.1절 거사 당일 만세가 터져나왔다. 첫날 만세를 불렀던 7개 도시 중 경성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6개 도시가 모두 북한의 도시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첫날 만세를 불렀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할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6개 도시가 모두 이미 그 당시 평양 대부흥 이후로 서북지방으로 퍼져갔던 기독교 부흥도시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남쪽의 유관순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독교회의 청년부와 YMCA그리고 기독교 계열에서 세운 미션 스쿨 중심으로 만세를 부른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수 개월간 이어진 만세 운동이 끝나고 체포 검거자 숫자가가 200만에 가까운 천도교 측의 체포자(1322명)에 비해 23만명 정도의 신도밖에 없었던 그당시 기독교계의 체포자(1914명)가 훨씬 많았음이 이를 반증한다.
특히 선교지 분할 정책에 의해 캐나다 선교사들의 관할구역이었던 함경도 지역의 각 도시들은, 미국정부의 지시에 의해 일제 총독부에 협조를 할 수밖에 없었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비해 선교사와 민족지도자들이 함께 모의하고 함께 거사를 준비했다는 점에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교통편이 불편하여 원산에 비해 독립선언서의 도착이 늦었던 함흥에서는 3월 3일에 만세가 터졌으며, 함흥고보 학생과 캐나다 선교사가 세운 제혜병원 및 영생학교 영생여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첫날 체포자 중에 학생이 88명, 일반인이 46명이었던 것만 보아도 학생들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독립선언서 도착이 좀더 늦었던 성진(지금의 김책시)에는 3.10일에 만세가 터졌는데,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 인쇄할 곳을 못찾아 어려움을 겪을 때, 제동병원과 욱정교회, 보신학교를 세워 조선인을 돕던 구례선 선교사가 자기 집으로 그들을 불러들여 교회 주보를 인쇄하던 등사기로 독립선언서 3만장을 인쇄하여 인근에 배포하였다.
구례선(그리어슨) 선교사는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일제 경찰에 붙들려 취조를 당하였고, 자기 교회 성도들이 절반이나 투옥된 상태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힘을 주기 위해 교회 종탑에 올라가 피눈물의 타종을 하며 성진 감옥소에 붙들린 성도들을 격려하였다.
그렇게 캐나다 선교사들은 함께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로인해 숫자적으로 15배(3천명)나 많았던 미국 선교사 보다도 더 많은 선교사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훈장을 받았다. (그리어슨, 스코필드, 마틴, 바커)
그렇게 살아있었던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어찌하여 이토록 변질되었는지 가슴아프고 통탄할 일이다. 오늘 3.1절을 맞이하여 성진 욱정 교회 종탑에서 울리던 그 종소리를 다시 들려주고 싶다.
=====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상권 마지막 부분, 성진의 종소리) ====
3월 18일, 성진 만세가 일어난 후 첫 주일이 되었다. 구례선 목사가 예배를 위해 단상에 서니 교회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평소에는 꽉 들 어차서 앉을 틈이 없었던 욱정교회였다. 강학린 목사와 배민수를 비롯 하여 그의 조수 김성우까지 제동병원과 보신학교의 직원 학생들 중 많 은 사람들이 유치장에 들어가 있었다. 구례선 선교사 역시 그동안 경찰 서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취조하던 순사는 성경의 로마서 13장 1 절을 들이대며 큰소리쳤다. 을사늑약 이후로 이토의 지시로 말단 순사 들조차 이 성경 구절은 다 외우고 있었다.
“당신들이 믿는 성경에도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씌어 있지 않소?모든 권세가 다 가미사마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지 않았소?그런데 왜 당신은 조선 사람들에게 이걸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오?당신과 함께 모의한 조선 사람들을 다 대시오.”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지금 너희 일본이 저지르고 있는 만행 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협조를 안 하면 당신도 한패가 되어 유치장에 들어갈 수 있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보지 못했느냐?너희 나라가 외국에 강제로 점령당해 핍박을 받는다면 너희는 가만히 있겠느냐?”
구례선은 물러서지 않았고 맞받아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동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일경은 그를 회유와 협박으로 몰아붙였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결국 동맹국 영국의 연방국 캐나다인을 손댈 수 없어서 자정 무렵 방면하였다.
그날, 구례선은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눈물로 하나 님의 말씀을 전했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있을 성도들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축도를 마친 구례선은 달음박질치듯 본당 밖으로 뛰어나 갔다. 교회 현관 안에 딸린 작은 문을 열고 빙글빙글 도는 철제 사다리 를 타고 뽀족한 교회 종탑 위로 기어 올라갔다. 새벽 기도를 위해 아침 마다 울리던 종이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마치고 올라가기는 처음이었다. 종탑 위에 서니 나지막한 조선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앙 증맞은 풍경 너머 멀리 흉물스런 성진 경찰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구 례선은 미친 듯이 종을 치기 시작했다. 옥에 갇힌 성도들의 얼굴을 떠올 리며 그들이 이 종소리를 듣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있는 힘껏 종을 쳤다. 그의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렸다.
“하나님 불쌍한 조선 백성을 구원해 주옵소서. 저 악한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물러가게 도와주옵소서.”
쉴 새 없이 종을 치는 구례선의 얼굴에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렸다. 동네 산기슭마다 흐드러진 개나리가 활짝 피어 있었다. 그 날따라 성진의 푸른 창공은 멀리 수평선과 맞닿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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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장로회 선교부는 3·1만세 운동의 격동이 물러간 후 7월 10 일, 일제의 만행을 엄중히 경고하고 항의하는 내용을 조목조목 문서로 작성하여 당시 조선 총독 하세가와에게 제출하였다.
“우리는 일본정부가 취한 부당하고 비인간적인 방법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표시합니다.
- 무방비한 남녀, 어린이에게 사격과 총검질을 가함
- 일본 민간인이 조선인을 곤봉으로 때림
- 총과 갈고리로 무장한 소방수가 평화적 시위자들에게 야만적인 공격을 가함 -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 시위자를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함
- 혐의자를 재판 전에 매우 비위생적인 상태로 구류함
- 경찰 심문 중에 가혹한 고문을 행함
- 범죄자를 경찰이 야만스런 구타(태형)로 처벌함
- 마을을 불태우고 멋대로 재산을 파괴함
- 제암리 학살을 저지름
- 전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잔인한 방법
- 기독교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등.”
3·1 운동 이후 많은 나라의 선교사들이 일제 만행을 규탄하였지만 문서로 항의한 나라는 캐나다가 거의 유일했다. 뒷날, 제암리 학살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일제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밝힌 스코필드(석호필) 박사 와 함께 바커(박걸), 마틴(민산해), 그리어슨(구례선)은 모두 3·1운동을 도운 캐나다 선교사로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