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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_8.신사참배 강요 및 북한교회의 수난

by 신비한 posted Dec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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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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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 _8. 신사참배 강요 및 북한교회의 수난 

 

   1919년 7월 2일, 신도 종교의 조선 본산이 된 조센진구( 朝鮮神宮)이 서울 남산에 착공해서 1925년에 준공하고 태양신 '아미데라스 오미가미'( 天照大神)와 일본 황실 조상과 명치천황(明治天皇)에게 헌당하였다. 총독부는 이로부터 한반도의 방방곡곡에 신사(神社)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우상숭배를 절대 금지하는 기독교계에 있어서 신사참배의 강요는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큰 시험거리가 되었다. 1931년부터 만주사변에서 죽은 전몰장병을 참배한 의식에 참여하도록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계 학교들에 강요하였다. 결국 평양의 숭실중학교의 윤산온(G.S.McCune)과 숭실대학교 교장 스누크(Mrs.V.Snook)는 교장직에서 물러나고 학교는 문을 닫는 것으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부터는 황민화(皇民化) 정책의 강화에 따라 본격적으로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선교부와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가 국민의례인가 아니면 종교의식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의가 오갔다. 

 

   1936년 천주교는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에서 있는 천주교 신자들은 국가의식에 참여해도 무방하니 이는 기독교를 욕 돌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교황청의 훈령에 따라 일제의 신사참배에 제일 먼저 굴복했고, 그해 11월에는 일본의 기독교연합회가 굴복하고 만다. 이어서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구세군 성공회 모두 저항을 포기하였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에 굴복했다고 해서 모든 목회자와 성도들이 굴복한것은 아니다. 개인적 그리고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북에서는 평양 산정현교회가 반대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주기철(1897-1944) 목사는 지도적 인물로서 1940년 5월 네 번째로 검거되어 평양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순교하였다. 이기선 목사와 채정민 목사는 서북 지방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많은 목사와 성도들을 규합하여 반대 운동을 조직화하였다. 1940년 3월 그들이 내놓은 결의문이다.

 

  * 신사참배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것

  *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켜서 현실 교회를 약체화 내지 해체시킬 것

  * 신사 불참배 성도를 규합하여 가정 예배를 보며 그것을 육성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타협과 굴복의 결과는 비참했다. 일본은 교회를 더 무참히 짓밟고 탄압하여 자기들의 발앞에 굴종케 하였다. 조선인 각 가정에는 태양신인 '天照大神'의 위패가 든 神社 모형을 안치하거나 종이로 만든 위해를 벽에 걸도록 하였다. 교회 예배당에서는 하나님게 예배하고 전에 먼저 일본 천황이 있는 동방을 향하여 경례하고 전몰장병을 위한 묵도를 하며 '황국신민의 선서'를 제창해야만 했다.¹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의 교리를 수정하게 만들고, 성경과 찬송까지 침범하고 제한하여 예배의 순수성을 앗아갔다. 신사참배, 국민의례, 시국 강연, 국방헌금 등으로 기독교인을 우롱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한 채 새삼스럽게 신사참배가 종교냐 아니면 단순한 국민의례냐 하고 묻는 것은 어이없는 논리의 희롱이다.

  ¹ Outline for Guidance of the Presbyterian Church adopted by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General Assembly (Nov.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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