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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_7.북한교회의 사회적구원

by 신비한 posted Dec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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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암5:24 "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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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_7.북한교회의 사회적구원 

 

[ 105인 사건 ]

 

1910년, 이등박문이 암살된 직후 일본 헌병대는 북한 지역의 애국 인사 약 600명을 무차별 체포했다. 그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그 안에는 목사 6명, 장로 15명, 집사 8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 123명은 ‘총독 암살 음모’라는 조작된 혐의로 기소되었고, 전덕기 등 여러 인물은 혹독한 고문 끝에 생명을 잃었다. 또한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105명이 5년에서 10년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북한 지역 교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처지를 동정했음에도 정치적 중립을 명분으로 내세웠고, 그 결과 교회가 불의에 맞서 정의를 세워야 할 사명을 놓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일제의 침탈을 외면한 신앙은 예배당 안에 갇혀 숨이 막혀가기 시작했다. 그 후폭풍은 참혹했다.

 

1911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는 ‘교육칙령’을 발표하며 한국에서의 교육 목적을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백성 양성”으로 규정했다. 그 영향으로 1910년 1,931개였던 사립학교는 1911년 1,242개로 급감했고, 기독교 학교 역시 746개에서 473개로 줄었다. 더 나아가 성경 과목과 한국사 과목은 교과 과정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신앙과 민족의 정체성이 동시에 짓밟히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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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 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은 태화관에 모여 총독부 관리들을 입회시킨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자리에서 즉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지만, 만세운동의 불길은 이미 꺼질 수 없었다.

 

두 달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약 1,500회의 평화적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는 비무장 군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를 지켜본 외부 인사들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 “한국인들은 총에 맞아 쓰러지고 칼에 베이고 찔리고, 체포되어 매맞고 고문당하고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참을성 있게 시위를 이어가는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다. 무력으로 맞선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점은 더욱 경이롭다.”

— The Korea Situation, No.2, June 1920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약 7,000명이 목숨을 잃고 1만 5천 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개신교 인구는 전체의 1.3%에 불과한 22만 명 정도였지만, 참여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았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 만세운동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9,456명 중 2,033명이 신자였다. 그중 약 80%는 북한 지역의 신자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참여자를 넘어 운동을 기획하고 추진한 핵심 주체였다.

 

아래는 당시 투옥된 한 여성 신자의 처절한 증언이다.

 

> “나는 평양에서 3월 2일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감옥에는 많은 남녀가 함께 있었다. 경관들은 우리 여성들에게 채찍을 내리치고 옷을 모두 벗긴 채 남자들 앞에 세워 두었다. 나에게서 찾은 죄목이라고는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내 몸을 돌아가며 마구 때려 전신이 땀으로 젖었고, 두 손을 뒤로 묶어놓은 채 알몸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춥다고 하면 담뱃불로 살을 지졌다. 어떤 여자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매를 맞았다. 한 전도부인은 두 손과 두 발이 모두 묶인 채 기둥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 우리의 성경은 빼앗겼고 기도는커녕 말 한마디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모든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 했다.”

— 「三一運動祕史」, 기독교사상 1966년 3월호.

 

3·1운동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분기점이었다. 신자들은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나라의 백성으로서 책임을 다했고, 한국인은 이 과정을 통해 민족적 자존과 정체성을 더욱 굳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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