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구한말 일제의 기독교 정책
1876년 일본은 조선에 강압적으로 개항을 요구하며, 본격적인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일본은 병든 호랑이에 비유되던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다.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함으로써 조선을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시기,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가치인 공의와 정의를 붙들고 일제의 침탈에 맞서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한 일본은 교회를 회유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교묘한 기독교 정책을 펼쳤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외국인 선교사들과 조선의 교회를 친일화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평양 감리교회 건축비로 1만 엔을 기부하고, 황성기독청년회(YMCA)에도 매년 1만 엔씩 희사하여 기독교계의 호감을 얻고자 했다. 또한 선교사들에게 각종 특권과 법적 보호를 제공하여 일부 인사를 친일 세력으로 포섭했다. 대표적으로 스티븐스(D. Stevens), 캐넌(G. Kennan), 래드(G. Ladd), 해리스(M. C. Harris) 등이 그 예로 꼽힌다.
이토는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명분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를 차단하고, 교회를 예배와 영혼구원에만 묶어두려 했다. 그는 해리스 선교사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상의 모든 일은 본인에게 맡기시오. 앞으로 조선에서 정신적 계몽과 교화의 일은 귀하들이 맡아 주시오. 그렇게 해야 조선인민의 유도 사업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대화는 일본이 정치적 지배를 담당하고, 선교사들이 종교적 지도와 교화를 맡는다는 일종의 ‘역할 분담론’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조선 교회는 복음의 한 축인 ‘사회구원’의 사명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다.
1907년 7월, 미국과 일본이 비밀리에 체결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이러한 흐름에 결정적인 불을 붙였다. 그 결과, 교회는 예배당 안에 갇히게 되었고, 복음의 사회적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장로교와 감리교는 당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 다수가 태프트–가쓰라 조약 이후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며 “영혼구원이 우선”이라는 편향된 교리를 전파했다. 그 결과, 교회의 사역은 개인구원 중심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영혼의 구원과 함께, 사회의 구원을 이루는 복음의 두 날개를 다시 펼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땅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