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코드 원’, 나의 하나님 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
"나의 ‘코드 원’, 나의 하나님"
나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 인생에서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은 내가 극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3년간 주일 성수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군 복무 내내 눈동자처럼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 이 순례자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고 뿌듯하다.
나는 스물네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당시 공군의 복무 기간은 35개월이었는데 선임들은 모두 나보다 어리고 내 또래는 장교들뿐이어서 군 생활이 쉽지 않았다. 사실 나이 때문이 아니더라도 군대는 누구에게나 두렵고 힘든 곳이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군대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음이 견고해진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나는 군 생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일 성수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깊이 깨달았다. 특히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배드리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때, 너무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심을 알 수 있었다. 나의 군 복무 시절,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그 35개월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다.
훈련소 생활
―“기독교 환자, 모든 종교 행사 금지!”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 있었다. 바로 ‘주일 성수’다. 어떤 상황이 와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주일을 온전히 예배로 섬기겠다고 서원했다. 그래서 훈련소에 있는 동안 생각한 것은 단 한 가지, ‘어떻게 주일 성수를 할 수 있을까’뿐이었다.
훈련소에서 맞게 된 첫 주일부터 시련이 있었다. 군대에서 처음 맞는 주일, 중대장은 모든 훈련병들을 연병장에 도열시켰다.
“오늘, 모든 종교 행사 금지. 기독교 환자, 천주교 환자, 불교 환자, 모든 종교 환자들은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말고 내무반에서 대기한다.”
훈련소는 ‘신자’들이 ‘환자’로 취급받는 공간이었다.
예배 시간 직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이 하얘지고 불안해졌다. 친한 동기 중에 목사님 아들이 있었는데 키가 커서 내가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친구였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교회에 가자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친구뿐이었다.
“같이 교회 가자.”
그런데 이 친구는 단번에 거절했다.
“야, 미쳤냐? 내무반에서 대기하라잖아.”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나는 혼자 내무반에서 나와 무작정 교회로 갔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은혜가 넘치는 예배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평안하고 행복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무반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신병이 입대하자마자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했으니 후환이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예배를 드린 후 떨리는 마음으로 내무반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빨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들 정신없이 바빠서 내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첫 주일을 무사히 넘어가게 해주셨다.
그 후 어느 수요일 저녁, 수요 예배를 드리려고 당직 사무실에 허락을 받으러 갔다. 혼자 교회에 다녀온 나를 보고 마음이 찔렸던지, 골리앗 친구도 따라왔다. 혼자가 아닌 둘이라 자신만만했지만 당직을 서고 있던 중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새하얀 오각형의 얼굴, 하늘을 찌를 듯 위로 올라간 실눈이 우리를 매섭게 째려보았다. 마치 납량 특집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 같았다.
“왜 왔어?”
그의 살기 어린 질문에 골리앗은 그대로 얼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었다. 나는 두려웠지만 큰소리로 외쳤다. “필승! 이은태 외 한 명,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이 자식들이 정신이 나갔나? 빨리 들어가!”
마 중사가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저희는 꼭 교회에 가야 합니다!”
“뭐? 교회? 죽기 전에 빨리 안 꺼져!”
이 한마디에 골리앗은 내무반으로 돌아가자고 울먹거렸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교회에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돌하게 외치는 내 모습을 본 마 중사가 갑자기 눈의 힘을 풀었다.
“야, 이 자식아. 너 그렇게 교회 가고 싶으면, 열 명 데려와 봐. 열 명!”
“네, 알겠습니다.”
교회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아무 대책 없이 내무반으로 달려갔다. 고된 훈련으로 지쳐 곯아떨어진 내무반 동료들을 떠 올리자 걱정이 되었다. 이 밤에 누가 나를 따라서 교회에 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얘들아, 나랑 같이 교회 가자. 지금 열 명이 모여야 교회에 갈 수 있어.”
내가 다급하게 부탁하자 불교, 천주교, 심지어 남묘호렌게쿄를 믿고 있던 친구들까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모두 열두 명이었다.
“훈련병 이은태 외 열두 명,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그 모습을 본 마 중사는 놀라서 얼굴이 더 하얗게 됐고, 열세 명의 훈련병들은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찬양을 부르며 교회에 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들까지도 모두들 신나게 교회에 갔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기적의 밤이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에 참석하는 기쁨을 허락하셨고, 나는 기본 군사훈련 4주와 특기 교육 6주의 훈련병 생활을 하면서 주일예배에 모두 참석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이 놀라운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공군본부로 자대 배치
―“상병 이상 집합!”
훈련이 끝난 후 나는 서울에 있는 공군본부로 배치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군 소속 군인들은 대부분 지방으로 배치를 받는다. 공군은 북한군 비행기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루 종일 레이더만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산신령’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서울 공군본부로 배치 받으면 산신령이 되지 않아도 되고 2주마다 한 번씩 외박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군 훈련병들에게 공군본부는 꿈의 부대였다. 공군본부로 가는 날, 공군본부로 배치를 받은 훈련병들이 탄 기차 안은 영등포역까지 가는 내내 축제 분위기였다.
나도 공군본부에 배치되어 기쁘고 좋았지만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당장 서울에 도착하면 주일인데 배치받은 첫날, 부대에 가자마자 과연 교회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기도만 했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해 더플백(군용 배낭)을 메고 열차에서 내리는데, 사방에서 주먹이 날아오고 구둣발이 옆구리를 걷어찼다. 공군본부로 우리를 데려갈 고참들이었다.
“이 자식들! 군기가 빠졌구나. 각자 더플백 입에 물고 대방동까지 기어간다, 실시!”
더플백은 등에 지고 다녀도 무거운데, 입으로 물고 가라니. 이렇게 험한 고참들 밑에서 군 생활하면서 주일 성수는 어떻게 하나, 이제 교회는 다 갔구나 싶었다.
나는 운전병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수송대에 배치받았다. 수송대에 도착하니 주말이라 고참들이 대부분 외박을 나가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때 주번 사감으로 있던 상병이 밤새 열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할 테니 좀 자두라고 했다. 상병의 얼굴이 선해 보여서 나는 용기 내 부탁했다.
“제가 크리스천인데요. 오늘 주일이라 교회에 꼭 가야 합니다. 교회에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 나도 천주교인이야. 일단 좀 쉬고 있어. 이따가 내가 교회 가게 해줄게.”
일단 내무반에 들어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예배 시간이 될 때까지 한숨도 못 자고 다시 그 상병에게 갔다. 그러자 상병이 일병을 붙여 주며 같이 교회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 자대를 배치받은 첫 주일은 무사히 넘겼다. 그런데 외박을 나갔던 고참들이 속속 돌아오면서 부대 분위기가 살벌해져 갔다.
나의 직속 고참은 두 달 먼저 수송대로 온 사람이었다. 나이가 나보다 어렸는데 나를 매일 화장실 뒤로 끌고 가서 욕을 퍼붓고 두들겨 팼다. 교회에 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맞으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박을 받으며 힘들게 교회에 다니던 어느 날, 수요 예배에 가기 위해 당직 사병을 찾아갔다. 병장인데 인상이 얼마나 무섭던지 뱀파이어가 연상될 정도였다. 독기를 품은 눈빛과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은 이빨. 그래도 훈련소 시절에 마 중사를 꼼짝 못하게 했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보고를 시작했다.
“필승! 이은태 이병. 교회 다녀오겠습니다!”
그랬더니 이 병장이 나를 한 번 째려보고는 마이크를 켰다.
“상병 이상 집합.”
그 말은 부대 내 모든 내무반으로 방송되었고, 하늘같은 상병들이 총알처럼 달려와 내 앞에 일렬로 섰다.
“이 자식들! 도대체 신병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다 박아!”
내 앞에서 고참들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그것도 모자라 병장은 엎드려 있는 상병들을 구둣발로 걷어찼다.
“신병 교육 제대로 시켜.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그땐 다 죽을 줄 알아, 알았어? 해산!”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무반 고참에게 끌려갔다.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고 서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셨는지 고참이 딱 한마디만 했다.
“앞으로 1년 동안 교회 나가지 마라. 또 교회 가면 죽는다.”
다행히 매도 맞지 않고 험한 소리도 듣지 않았지만,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밤새 기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나님, 제발 교회 가게 해주세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회 가게 해주세요.”
원처치 저자 이은태 목사

어머니의 서원을 무시하고 세상 속에 살다가 교통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은혜를 체험했다. 뉴질랜드 유학 중 가진 돈은 다 떨어지고 절망의 나락에 있었으나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체험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세 개의 빌딩을 받고, 크리스천 영어학교를 세워 매년 200여 명의 기독청년에게 장학금을 주며 훈련을 시키고 있다. 뉴질랜드 최대 선교센터를 세워 17개 국제선교단체 지원, 다니엘 크리스천 캠프, 노인 나눔센터 사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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