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길에 머물지 말아라
광야 길에 머물지 말아라
“광야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길일 뿐이다”
Taupo를 지나 1번 국도로 Wellington까지 가려면 Ruapehu 산을 옆에 두고 Desert Road를 지나가야 한다. 황량한 갈색 들판은 푸르름의 뉴질랜드와는 사뭇 다르다. 생명은 살지 못할 것 같고, 아무런 볼거리도 없을 것 같은 광야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광야를 지나가는 것이 불편하고 지루해서, 다른 길을 택하거나 가급적 지나갈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나름 흔하지 않은 길을 운전하는 맛이 있고, 갈색 들판이 볼만하고, 겨울에는 눈도 보고 만질 수 있기에 일부러 갈 일을 만들고도 또 가고 싶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따갑게 눈총을 준다. 광야 길을 지나 Wellington에 다다를 것을, 마치 광야에 머무를 것처럼 쓴소리를 한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할지라”(출14:3)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omniscience)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바로가 광야 길로 가겠다는 이스라엘을 죽으러 간다고 여길 것을 말씀하셨고, 바로는 한치의 틀림도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는 하나님 없이 세상의 통념에 점령당한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을 업신여기고 비아냥대며 비극적 종말을 속단(hasty conclusion)했다. 요즘 기독교가 광야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소리들과 현상들도 바로의 허망한 소리와 다르지 않다.
‘아득하여’는 ‘당황하여’, ‘혼돈하여’라는 뜻으로 광야에서 길을 잃고 목적도 방향도 능력도 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the land in confusion, NIV). 하나님 없는 바로가 보기에는 아득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능력으로 진행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바로의 속단은 무의미하다. 울리는 꽹과리 소리이자 외롭고 두려운 독백(monolog)에 불과하다.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는 바로가 광야에 갇힌 이스라엘을 군대를 동원하여 추격할 것을 암시한다. 광야에 갇혔기 때문에 군대로 공격하면 몰살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나안으로 향하는 과정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곧 결과이고 결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은 하나님을 신앙 함의 증표이자, 축복에 도달하는 과정(신2:7)임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불신자는 삶을 조각난 파편(fragmentarily)으로 보지만, 신자는 하나하나 맞춰지는 퍼즐로 본다. 불신자는 오늘을 판단하지만 신자는 내일을 기대한다. 불신자는 무시되는 과정이 낳은 오늘의 결과로 좌절된 그 자리에 머물러 서서 인생을 말하지만, 신자는 과정으로 완성되는 내일의 축복된 신앙을 삶이라 말하고 한결같은 일상을 산다.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비아냥과 협박과 저주 섞인 공격들은 완성될 축복된 삶을 이루는 광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이 조각이 맞춰져야 퍼즐은 완성되기에 기꺼이 광야를 간다. 신자가 보여주고 살아내야 할 단 하나의 일상은, 현대의 바로에게 위축되거나 논쟁하거나 굴복당하지 않고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 길을 묵묵히 지나가는 것이다. 광야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통과하는 길일 뿐이다. 비밀을 아는 자의 여유로움, 비밀을 모르는 자를 위로하는 배려심,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으로 어제와 같은 오늘을, 내일과 같아야 할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당신의 광야는 무엇이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당신은 광야에 머물러서 뒤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며 걱정과 원망을 하지는 않는가?
광야에 머물지 말아라. 광야를 빠르게 지나가려고 만도 하지 말아라. 광야를 살피고 분석하며 축복된 신앙의 삶을 위한 긍정의 요소들을 수확하라. 광야가 아직 끝나지 않은 길에서 남은 길을 섣불리 절망적으로 전망하지 말아라. 현재의 광야를 냉철한 이성적 신앙의 관점으로 분석하고 분별하라. 광야로 불편해하고 불만스러워하지 말고, 광야로 인해서 하나님 신앙의 절실함과 극복된 이후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라. 오늘을 극복하지 못하면 내일은 더 고통스럽겠지만, 오늘을 극복하며 내일은 더 단단해지고 더 영광스러운 신앙을 살 수 있다. 광야 길에서 멈추지도 머물지도 않고 한결같은 신앙을 살며 통과할 때 곧 광야의 끝에 서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원처치 저자 윤석 목사

강원대학교 Civil Engineering(BSc) 전공, 뉴질랜드 BCNZ(현 Laidlaw College) 목회학(BMin)을 졸업했다. 1988년부터 한국대학생선교회(KCCC) NLTC와 서울대학교에서 사역했다. 1994년 오클랜드 대학에서 KYCF를 설립하여 사역했고, 2005년에는 직장사역연구소(BMI) 뉴질랜드 지부를 운영했다. 2009년 주를향한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고, 2001년부터 현재까지 KOSTA 공동대표 및 운영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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