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이야기

뉴질랜드 연대별 부흥역사(4) 윌리엄스 선교사 형제

by OneChurch posted Nov 22, 2018 Views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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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 헨리 윌리엄스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NZ HISTORY

 

뉴질랜드 연대 별 부흥 역사 (4)

 

*다음은 오순절계통의 단체에서 작성한 글을 번역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825: 윌리엄 윌리엄스(William Williams)와 헨리 윌리엄스(Henry Williams)

 

헨리 윌리엄스는 14-23살에 영국 해군으로 복역하면서 나폴레옹 전쟁과 1812년 전쟁을 겪은 뒤, 기독교 선교사가 되어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헨리 윌리엄스는 와이탕이 조약(1840) 문서 번역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39년 8월 윌리엄 홉슨(William Hobson) 대령은 식민성으로부터 뉴질랜드의 영국 식민지화 절차를 밟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홉슨은 1월 14일 시드니에서 부총독으로 취임한 후 1840년 1월 29일 베이오브아일랜즈에 도착했다.

 

식민성에서 조약서 초안을 받지 못한 홉슨은 자신의 비서인 제임스 프리먼(James Freeman)과 영국인 제임스 버스비(James Busby)의 도움을 받아 조약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하여 조약서 전문은 4일 만에 완성되었다.

 

마오리인들이 영문으로 된 조약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홉슨은 헨리 윌리엄스와 마오리어에 능숙한 그의 아들 에드워드(Edward)에게 와이탕이 조약서를 마오리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고, 이들은 하루만인 2월 4일 번역을 마쳤다.

 

당시 마오리어에 능숙했던 윌리엄 윌리엄스는 포버티베이(Poverty Bay)에 있었다.

 

윌리엄은 1826년 3월 25일 파이히아(Paihia)에 도착하여 8년간 선교학교를 맡았다.

 

언어학자로서 교육을 받았던 그는 가장 먼저 마오리어 구조를 연구했다.

 

그 결과 윌리엄은 1844년 '뉴질랜드 언어 사전'과 '기본 문법 사전'을 출간했다.

 

선교 영역 확장 계획으로 인해 윌리엄스는 테임즈(Thames)와 망가포우리(Mangapouri)에 새로운 선교관을 열었다.

 

1833년 그는 이스트코스트 포버티베이 지역을 방문하여 원어민 교사들을 양성했다.

 

그로부터 5년 후, 콜렌소(Colenso), 매튜스(Matthew), 스택(Stack)과 함께 이 지역을 다시 방문한 그는 영구적인 선교관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1839년 4월 윌리엄스와 테일러(Taylor)는 이 곳을 다시 방문하여 선교관이 들어설 부지를 선정했다.

 

이듬해, 윌리엄스는 가족들을 기스본(Gisborne) 타우랑가(Tauranga)로 데려왔고, 이스트 케이프(East Cape)에서 케이프 팰리서(Cape Palliser)까지 선교 구역을 확장했다.

 

1837년, 윌리엄스는 자신이 번역한 마오리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였다.

 

1851년 초, 윌리엄스는 선교사들의 토지 청구가 헤케(Heke)에게 전쟁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어줬다는 조지 그레이(George Gray)의 주장을 반박하고 헨리 윌리엄스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영국의 소속 선교회인 CMS로 보내졌다.

 

비록 그는 형 헨리 윌리엄스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레이의 잘못된 주장이었음을 밝히면서 교회선교회 CMS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번역: 안수민

출처: Jesus Hub

http://jesushub.org/nz-revival-history/

 


원처치의 뉴질랜드 종교 이야기

뉴질랜드 종교 및 기독교 관련된 내용들을 번역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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