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 이야기

뉴질랜드 연대별 부흥역사 (11) - 허버트 부스, 토마스 켐프, 스미스 위글워스

by suahn721 posted Feb 21, 2019 Views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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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자 스미스 위글스워스의 모습

 

뉴질랜드 연대별 부흥역사 (11)

허버트 부스, 토마스 켐프, 스미스 위글스워스

 

*다음은 오순절계통의 단체에서 작성한 글을 번역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1919: 허버트 부스 (Herbert Booth)

1919년 고(故) 부스 장군(구세군 창설자)의 아들 허버트 부스가 뉴질랜드로 왔다. '기독교 커버넌트 (Covenanters) 연합군'이 탄생한 것은 이러한 운동에서 나온 것이다.

 

1920: 토마스 켐프 (Thomas Kemp)

1920년에 토마스 켐프는 오클랜드 침례 장막 교회의 목회를 맡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를 기적적으로 치유하셨고 이 때문에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흥을 위해 매일 기도회를 가졌고 이는 18개월이 넘게 지속되었다 – "'우리를 다시 살리지 않으실 것이다(wilt Thou not revive us again)' 라는 부담감과 함께".

 

1922: 스미스 위글스워스(Smith Wigglesworth)

 

중국 대륙 선교의 선교사였던 플러튼(Mr J. Fullerton)은 중국 유난의 성령 대부흥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매우 짧은 시간 안에 9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주께로 모여드는 큰 기쁨을 맛보았다.

 

어느 날 밤 기도하는 동안 그는 뉴질랜드를 위해 깊이 기도하였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곳에 성령을 쏟아 붓으려 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본국인 덴마크에서 안식년을 가지고 있을 때 복음주의자인 스미스 위글스워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뉴질랜드를 드러내 보이셨다고 말하며 그에게 뉴질랜드를 방문할 일정이 없는지를 물었다.

 

이 복음주의자는 이것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가 이 나라에 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로버츠 목사(Pastor H.Roberts)는 스미스 위글워스를 뉴질랜드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들을 만들어 주었다.

 

로버츠는 영국 복음주의자인 헨리 발리(Henry Varley)를 통해 1889년에 회심하였고 33년간 광야에서 험한 기독교인의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뉴질랜드를 위한 영적 부담을 안고 있었다.

 

부흥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았던 그는 웰링턴의 각 지역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했고 이 중 9 곳은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던 사람들은 당시 매우 파워풀한 축복의 시절이었다며 로버츠 목사는 그 복음 주의자가 오는 것이 기도를 통해 끊임 없이 간구한 것에 대한 응답이라 믿었다고 증언하였다.

 

복음주의자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1922년 5월 말 뉴질랜드에 도착하였다.

 

두명의 크리스천 동역자와 함께 로버츠 목사는 믿음으로 큰 타운 홀을 빌리고 하룻밤 임대료인 8 파운드 10센트 중 일부를 지불하였다.

 

웰시 부흥의 목격자인 비비안 스트리트 침례교회 목사는 아침 모임을 위해 주일 학교 홀을 내 주었고, 이 복음주의자는 '권력의 굴복'과 '성령의 선물'에 관한 연이은 연설로 집회를 시작했다.

 

이 아침 모임에 참석자 수는 본 교회당을 개방하게 될 만큼 급격히 증가했고 이마저 곧 가득차게 되었다. 기형과 병마에 시달린 아이들의 기도에 기적과 같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많은 참석자들이 울부짖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몇몇의 성도들에게 역사가 일어났다.

 

절망적인 사례로 완전히 단념했던 한 수척하고 기력이 없는 창백한 얼굴의 남자가 혼수상태에 빠져있었지만, 기도 후에 활기가 넘치고, 고개를 들고 교회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저녁 집회에 타운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주일인 첫째 저녁에는 약 800여명이 참석하였다. 다음날에는 160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셋째 저녁에는 3000명으로 늘어 홀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때부터 3주 간 사람들이 입장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타운홀이 가까워 올 수록 거리에서 서두르며 뛰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목격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하루는 1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입장을 하지 못했다.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브리스번에서 온 구세군 사역자는 계단에 서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그 중 적어도 20여명이 회심하였고 몇몇은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였다.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 받았으며, 웰링턴에서 온 한 연약한 자에 의해 쓰여진 다음 서약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영혼들이 치유되었다.

 

“나는 목발을 짚고 타운홀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나를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위글스워스가 내게 손을 얹었고 다른 한 노동자가 나에게 기름을 부었으며 위글스워스는 나에게 걸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 목발을 건네주고 집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꽉 끼는 스타킹이 벗겨지는 것 같은 느낌으로 치유를 경험했다."

 

2000명이 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800 여명의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방언을 했으며, 귀신들이 쫓겨나고 수백명이 물로 침례를 받았다.

 

1922년 7월 17일 웰링턴에서는 수많은 회심자들이 있었고 H. 로버츠 목사가 성도들을 위한 선교사로 있는 새로운 조직을 "웰링턴 시티 미션"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하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또한 1923년 10월 27일부터 11월 11일까지 오클랜드 타운홀에서 치유 집회를 열었다.

 

 

원처치 뉴질랜드 onechurchnz@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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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수민

원본: Jesus Hub

http://jesushub.org/nz-revival-history/

 


원처치의 뉴질랜드 종교 이야기

뉴질랜드 종교 및 기독교 관련된 내용들을 번역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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