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엘교회 오클랜드 서부교회
가곡(歌曲)에서 말씀을 만나다

[ 가곡에서 말씀을 만나다 1 ] 청산에 살리라 

by 사무엘 posted Feb 05,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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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ckcake

 

가곡에서 말씀을 만나다 

 

청산에 살리라 

 

"'청산'은 하늘을 닮고, 하늘을 담은 산에 살겠다는 결의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으로 지으셨습니다.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창 1: 26)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겉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우리의 외양이 하나님과 비슷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바로 ‘사랑’과 ‘자유’입니다.

 

사랑과 자유

자유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자유라고 하면 우리는 나쁜 것과 좋은 것 중에 한 가지를 선택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선과 악을 선택하는 것으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는 선한 것 안에서도 더 창조적이고 더 풍성한 생명을 향유할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문화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과 ‘자유’가 훼손되어 이 문화명령을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께서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이름을 믿는 우리에게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랑과 자유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나 의지가 없는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종입니다. 그러니 자유가 박탈된 종이 아니라, 자유가 주어졌으나 그 자유로 하나님의 종으로 순종하기를 결정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 구원으로 인해 우리는 죄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죄의 종에서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과 ‘하나님의 ’에서 ‘종’이라는 글자는 같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죄의 종은 이미 선택의 자유가 없지만, 하나님의 종은 선택이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예수께서는 당신이 백성을 구원하신 후 ‘종’으로 부르시지 않고 ‘친구’ ‘자녀’라로 불러주신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또 갈라디아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는 자유자이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럼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나의 status

백성들에게 헌신적인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왕족은 아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공주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미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 옆엔 왕족인 덕만 공주가 있었습니다. 덕만 공주도 백성들에게 헌신적이었습니다. 

 

이 둘은 첨성대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서로 달랐습니다. 미실 공주는 천문학 지식을 자신이 독점하고 통제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덕만 공주는 천문학 지식을 모든 백성들에게 알려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두 공주의 생각은 왜 이렇게 달랐을까요?'

 

미실은 오매불망 오직 한 가지 꿈이 있었는데 그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것을 늘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손인 덕만은, 공주로서, 백성들에게 어떤 좋은 해택이 돌아갈지를 늘 고민하였습니다. 반면 미실은 자신이 왕이 되는 길이라면 신라와 그 백성이 어떤 피해를 본다고 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그러나 덕만은 아버지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라와 그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어떤 피해를 본다 해도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미실은 백성들에게 노예근성을 가르치고 그것을 독려했습니다. 거기에다 미실을 뛰어 넘을 생각조차 못하도록 누구든 혹독하게 처벌했습니다. 그런데 미실은 어린 덕만 공주보다 더 강하고, 더 계획적이고, 더 월등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왕이 된 사람은 미실이 아니라 선덕여왕이 된 덕만 공주였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미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환상에 눈이 멀어 언제나 악수/惡手를 선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실은 자신의 선택이 늘 바르다고 믿고 그렇게 밀고 나갔습니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거사 전에는 미리 승리를 자축까지 했었습니다.

 

그럼 그녀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언제나 옳았지만 그것이 늘 잘못된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녀는 진짜 공주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공주의 옷을 입고, 공주라는 호칭을 얻고 살아갔지만 그녀는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늘 왕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을 탓하다가 결국 자신의 능력으로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야심이 결국 그녀에게 공주의 호칭을 얻게 해주었지만 그것이 결국 그녀를 허망한 죽음으로 이끌어 가고 말았습니다.

 

세종대왕은 온 백성이 서로 소통하여 수준 높게 잘 사는 백성이 되게 하기위해 한글을 창제했지요. 반면 신하들은 자신들이 지식을 독점하기위해 한글창제를 목숨 걸고 막았습니다. ‘주인의 아들’이 하는 노력과, ‘주인의 종’이 하는 노력은 그 질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종이 언제나 최선을 다하여 옳은 일을 선택한다 해도 결과는 언제나 잘못된 선택일 뿐입니다. 종은 주인의 세계를 모릅니다. 주인의 즐거움을 모릅니다.

‘status’는 상태 지위 신분을 뜻하는 영어 단어입니다. '나는 나의 현재 status가 뭔지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세상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명확한 것은 우리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6절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고 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서 14장 7-8절 말씀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또 요한복음 15장 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청산에 살리라

빌립보서 3장 18-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아벨과 가인의 제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기였어요. 가인은 농사지은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거절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여러 각도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벨은 하나님께 속한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가인은 땅에 속한 자였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세상의 풍요와 안녕을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 하늘에 속한 자와 땅에 속한 자의 기도는 어떻게 다를까요?'

 

하늘에 속한 자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하늘에서 그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자의 기도는 어떨까요?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며 드리는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를 묻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지금 내가 어디 소속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7) 가이사(케사르)가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이제 내 소속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너는 지금 누구에게 속해있냐?" 라는 질문을 베드로가 간파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고백처럼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가 주만 의뢰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26:13)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시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을 때 하셨던 말씀 기억하시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

 

이 극한 상황에서 이 말씀이 나오는 사람은 분명 그 소속이 아벨처럼 하나님 소속일겁니다. 사실 땅의 사람 즉 세상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은 겉으로는 잘 모릅니다. 둘 다 말씀도 보고 떡도 먹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차이가 어디서 날까요?

 

그것은 ’떡을 위해 말씀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말씀을 위해 떡을 추구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이 땅에 살면서 땅의 사람인지 하늘의 사람인지를 명확히 고백하는 베드로의 시간 앞에 서있습니다. ‘살아 있는 바닷고기는 결코 소금에 절여지지 않는다.’ 명언입니다. 사람들이 낚시한 바닷고기 회를 먹을 때 간장에 찍어먹는 이유는 그 고기가 바닷물이 절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비록 이 땅에 살지만 결코 이 땅에 절여지지 않습니다.

 

우리 가곡 ‘청산에 살리라’는 한양대학교 설립자이며 이사장인 김연준님이 가사와 곡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맑고 수려한 국민 가곡은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옥중에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감옥에 수감된 그는 배신과 분노와 억울함과 허탈로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결코 그를 구원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감옥 속에서 발견한 것이 청산이었습니다.

 

나는 수풀 우거진 / 청산에 살으리라. / 나의 마음 푸르러 /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 허리엔 / 초록빛 물들었네. / 세상 번뇌 시름 잊고 / 청산에 살으리라.

길고 긴 세월 동안 /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 청산은 의구하니 / 청산에 살으리라.

 

 

‘청산에 살으리라’는 하늘을 닮고, 하늘을 담은 산에 살겠다는 결의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도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살아 내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늘을 닮아가는 삶입니다. 땅의 삶을 추구하다 빼앗기고, 배신당하고, 그로인한 분노와 억울함과 허탈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땅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이 자리에 빼앗긴 것을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복수하지 못하고, 여전히 분노와 억울함과 허탈함을 가지고 왔습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 지옥 같은 감옥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지금 나를 회복시키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예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집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피해자가 아니라 화해자로, 독설가 에서 통역가로, 비평가에서 해설자로, 독점가에서 자선가로. 감옥에서라도 청산을 바라보고 청산에서 살게 되기를 기도 합니다.

 

원처치 칼럼은 저자의 주장이 담긴 글입니다. 정치적, 신학적 의도나 방향이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원처치 저자 박성열 목사

profile

박성열 목사는 뉴질랜드 남십자성어린이예술단 음악감독으로 8년 간 봉사했으며, 뉴질랜드 시온합창단(성인혼성) 지휘자로 또 8년 간 봉사했다. 또 뉴질랜드 오페라단 단원으로 12년 간 활동했다. 현재는 오클랜드 장로합창단 지휘자로 13년 째 봉사하고 있으며, 오클랜드 오라토리오코랄 운영위원장으로 12년 째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뉴질랜드 예수찬양교회 시니어 목사로 20년 째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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